조선말 시계 문물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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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48회 작성일 22-03-08 17:01본문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 똑딱..... 부지런히 일해요."
이런 동요가 있다. 시계 바늘이 쉬지도 않고 똑딱거리는 소리를,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견주어 노래한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에 이 소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똑딱 소리를 외국 귀신의 숨소리로 여겼던 것이다.
1847년 여름, 프랑스 배 두척이 전라도 앞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신시도라는 섬에 닿았다. 이 배에서 건져낸 물건은 거의 대포나 총이었는데, 관리들은 이것들을 재빨리 창고로 옮겨놓고 문을 굳게 잠가버렸다.
신시도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할 뿐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히 서양 물건에 손을 댔다가 서양 귀신이라도 옮으면 그날로 죽는 줄 알았던 때였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창고 문을 잠근 뒤 마을 사람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있다. 그런데 창고 안에서 똑딱똑딱 하는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섬은 다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무기들 속에 시계가 들어 있었던 것을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일 주일이나 계속해서 똑딱 소리가 들려오자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열었다.
"서양 귀신이 우리 섬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도깨비를 떨어뜨려 놓고 간 게 틀림없다!"
"당장 굿판을 벌여 서양 도깨비를 몰아내자!"
뭍에서 불러온 용하다는 무당이 한바탕 굿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의 일치로 똑딱 소리가 뚝 그쳤다.
감겼던 시계의 태엽이 다 풀어져 소리가 멈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진했던 우리 조상들은 그걸 알 리 없었으니 돌아보면 코미디 한 토막 같은 얘기였다. 그 당시 우리네가 알고 있었던 시계는 기껏해야 해시계 아니면 물시계였던 것이다.
차츰 여러 나라와 외교 접촉을 하면서 시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 말부터 밀물처럼 들어온 외래 문물 가운데 시계가 으뜸을 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때 시계를 처음 가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외교관들이었다. 이때는 팔목 시계가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외교관들이 가지고 들어온 시계는 모두 회중 시계였다.
양복 조끼에 시계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 척하니 들여다 보는 개화기 신사의 모습.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 부러워 했다. 그런 나머지 양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조끼만은 꼭 입고 시계를 넣고 다녔다.
부잣집 청년들은 금시계줄을 보란 듯이 늘이고 다녀 자신이 부자임을 은근히 자랑했으며, 돈 없이 허영심만 많은 젊은이는 시계 없는 시계줄만 조끼에 늘어뜨리고 겉멋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한다.
순종은 시계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계가 있었다. 이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한꺼번에 각기 다른 소리로 종을 울리면 몹시 기분좋아 했다고 한다. 이때 시계 하나라도 종이 앞서거나 늦게 울리는 날이면 순종은 당장 호통을 쳤다.
"저 놈 게을러서 못쓰겠다!"
이 때문에 창덕궁에는 시계 수리공이 늘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덕수궁에 계시던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드릴 때면 꼬박꼬박 여쭙는 말이 있었다.
"아바마마 시계는 지금 몇시오니까?"
그리고는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 시계를 맞추는 것이 하루 일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궁중과 높은 관리들은 시계를 널리 사용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시계가 뭔지 겨우 귀동냥이나 할 정도였다. 종로 2가에 있는 종각에서 치는 종소리가 곧 시계였으며, 이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던 시절이었다. 종지기가 인경을 알리면 그때부터 통행 금지였는데, 만일 이때 돌아다니다 걸리면 새벽 파루를 칠때까지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때 생긴 욕 아닌 욕이 '경을 칠 놈'이다. 이 말은 바로 종치는데 싫증이 난 종지기가 통금 위반으로 붙잡힌 사람에게 벌로써 종을 치게 했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의 손으로 본격적인 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45년 전인 1959년부터이다. 그 짧은 역사를 가지고도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계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과연 우리 겨레의 손재주가 어떠한가 증명해 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띠띠띠 뚜----, 정확한 ○○시계가 아홉 시를 알려 드립니다."
오늘날엔 텔레비전에서건 라디오에서건 이러한 시보를 들을 수 있다. 바로 이 시보가 시작된 것은 1961년이었다. 지금의 오리엔트 시계가 된 영명실업이 광고를 겸해 시보를 알린 것이 시초였으며, 그 당시 우리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이 시보에 시간을 맞추었었다. 국산 시계 개발과 함께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꽤나 비싼 귀중품으로 여겼던 시계가 값이 싸지면서 장식품으로 성격을 바꾸어 갔다.
이제 시계는 아주 흔해 시계 없이 다녀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거리 곳곳에 시계탑이 있고 전철역에도 시계가 있으며, 시보 또한 끊이지 않고 자주 나온다. 시장 한모퉁이에서는 한 개에 2천 원짜리 시계마저 팔고 있는 것이 요즈음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계는 차고 넘치지만 시계가 갖고 있는 본디 구실을 우리는 차츰 잊고 있지나 않는가 생각해 보자. 시간에 어긋나지 않게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계를 버젓이 손목에 차고도 약속에 늦는 사람, 시간 계산을 잘 해 넉넉하게 살기보다는 시간에 쫓겨 얽매여 있는 사람...... 시계의 본디 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림직하지 않는가?
이런 동요가 있다. 시계 바늘이 쉬지도 않고 똑딱거리는 소리를,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견주어 노래한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에 이 소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똑딱 소리를 외국 귀신의 숨소리로 여겼던 것이다.
1847년 여름, 프랑스 배 두척이 전라도 앞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신시도라는 섬에 닿았다. 이 배에서 건져낸 물건은 거의 대포나 총이었는데, 관리들은 이것들을 재빨리 창고로 옮겨놓고 문을 굳게 잠가버렸다.
신시도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할 뿐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히 서양 물건에 손을 댔다가 서양 귀신이라도 옮으면 그날로 죽는 줄 알았던 때였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창고 문을 잠근 뒤 마을 사람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있다. 그런데 창고 안에서 똑딱똑딱 하는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섬은 다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무기들 속에 시계가 들어 있었던 것을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일 주일이나 계속해서 똑딱 소리가 들려오자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열었다.
"서양 귀신이 우리 섬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도깨비를 떨어뜨려 놓고 간 게 틀림없다!"
"당장 굿판을 벌여 서양 도깨비를 몰아내자!"
뭍에서 불러온 용하다는 무당이 한바탕 굿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의 일치로 똑딱 소리가 뚝 그쳤다.
감겼던 시계의 태엽이 다 풀어져 소리가 멈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진했던 우리 조상들은 그걸 알 리 없었으니 돌아보면 코미디 한 토막 같은 얘기였다. 그 당시 우리네가 알고 있었던 시계는 기껏해야 해시계 아니면 물시계였던 것이다.
차츰 여러 나라와 외교 접촉을 하면서 시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 말부터 밀물처럼 들어온 외래 문물 가운데 시계가 으뜸을 차지하다시피 했다. 이때 시계를 처음 가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외교관들이었다. 이때는 팔목 시계가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외교관들이 가지고 들어온 시계는 모두 회중 시계였다.
양복 조끼에 시계줄을 늘어뜨리고 다니다가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 척하니 들여다 보는 개화기 신사의 모습. 이러한 모습은 누구나 부러워 했다. 그런 나머지 양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조끼만은 꼭 입고 시계를 넣고 다녔다.
부잣집 청년들은 금시계줄을 보란 듯이 늘이고 다녀 자신이 부자임을 은근히 자랑했으며, 돈 없이 허영심만 많은 젊은이는 시계 없는 시계줄만 조끼에 늘어뜨리고 겉멋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한다.
순종은 시계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계가 있었다. 이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기 위해 한꺼번에 각기 다른 소리로 종을 울리면 몹시 기분좋아 했다고 한다. 이때 시계 하나라도 종이 앞서거나 늦게 울리는 날이면 순종은 당장 호통을 쳤다.
"저 놈 게을러서 못쓰겠다!"
이 때문에 창덕궁에는 시계 수리공이 늘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또한 덕수궁에 계시던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드릴 때면 꼬박꼬박 여쭙는 말이 있었다.
"아바마마 시계는 지금 몇시오니까?"
그리고는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 시계를 맞추는 것이 하루 일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궁중과 높은 관리들은 시계를 널리 사용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시계가 뭔지 겨우 귀동냥이나 할 정도였다. 종로 2가에 있는 종각에서 치는 종소리가 곧 시계였으며, 이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던 시절이었다. 종지기가 인경을 알리면 그때부터 통행 금지였는데, 만일 이때 돌아다니다 걸리면 새벽 파루를 칠때까지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때 생긴 욕 아닌 욕이 '경을 칠 놈'이다. 이 말은 바로 종치는데 싫증이 난 종지기가 통금 위반으로 붙잡힌 사람에게 벌로써 종을 치게 했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의 손으로 본격적인 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45년 전인 1959년부터이다. 그 짧은 역사를 가지고도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계는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과연 우리 겨레의 손재주가 어떠한가 증명해 주는 본보기라 할 것이다.
"띠띠띠 뚜----, 정확한 ○○시계가 아홉 시를 알려 드립니다."
오늘날엔 텔레비전에서건 라디오에서건 이러한 시보를 들을 수 있다. 바로 이 시보가 시작된 것은 1961년이었다. 지금의 오리엔트 시계가 된 영명실업이 광고를 겸해 시보를 알린 것이 시초였으며, 그 당시 우리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시계는 이 시보에 시간을 맞추었었다. 국산 시계 개발과 함께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꽤나 비싼 귀중품으로 여겼던 시계가 값이 싸지면서 장식품으로 성격을 바꾸어 갔다.
이제 시계는 아주 흔해 시계 없이 다녀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거리 곳곳에 시계탑이 있고 전철역에도 시계가 있으며, 시보 또한 끊이지 않고 자주 나온다. 시장 한모퉁이에서는 한 개에 2천 원짜리 시계마저 팔고 있는 것이 요즈음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계는 차고 넘치지만 시계가 갖고 있는 본디 구실을 우리는 차츰 잊고 있지나 않는가 생각해 보자. 시간에 어긋나지 않게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계를 버젓이 손목에 차고도 약속에 늦는 사람, 시간 계산을 잘 해 넉넉하게 살기보다는 시간에 쫓겨 얽매여 있는 사람...... 시계의 본디 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림직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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